Opinion :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영애, 오로지 판화

관리자
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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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많은 관람객을 감동하게 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우향 박래현(1920~1976) 전시를 기억하시나요?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덕수궁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말입니다. 이때 전시를 본 많은 사람은 박래현이라는 탁월한 작가가 독립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라는 타이틀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당시 전시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도 있었습니다. 첫째는 김기창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로 살았던 박래현이 47세에 미국으로 유학갔다는 것이고, 둘째는 독자적인 추상화를 그리던 그가 뉴욕에서 판화와 태피스트리 등으로 표현 영역을 넓혀 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그는 왜 굳이 판화라는 낯선 매체에 도전했을까요. 박래현은 그 이유를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던 나에겐 깊고 절실하게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가지의 판화 기술이 매혹적이었다”는 글로 남겼습니다.


이영애, Another Day, 에쿼틴트, 39x60㎝, 2009. [사진 통인화랑]

이영애, Another Day, 에쿼틴트, 39x60㎝, 2009. [사진 통인화랑]


서울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판화전(3월 1일까지)은 그런 박래현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이곳에서 판화의 매력에 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만났으니까요. 이를테면, 네덜란드의 자코푸커는 섬세한 명암과 부드러운 질감으로 마법 동화의 한 장면 같은 화면을 보여줍니다.

대담한 구성과 색상으로 개성 뚜렷한 화면을 보여주는 한국 목판화의 대표작가 김상구, 서울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배경으로 도시 삶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민경아 작품도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전시작을 마무리해놓고 지난 7일 세상을 떠난 강행복 작가의 유작도 독특한 선과 색채의 세계로 보는 이를 끌어들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동판화 작업을 해온 이영애(74) 작품도 있습니다. 맑은 개울물과 조약돌을 판화로 표현할 생각을 하다니요. 화면 가까이 다가 가보면 세필로도 묘사하기 어려운 조약돌 표면이 치밀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Tomorrow’(내일)라는 작품에선 초록 줄기와 색색의 꽈리를 감싼 눈 부신 햇살까지 표현했는데요, 자연에 바치는 작가의 경탄 어린 시선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동판을 부식시켜 요철을 만드는 에칭기법인 에쿼틴트는 고난도 기술과 노동을 요구하는 기법으로, 1970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결혼해 두 자녀를 키우면서 이 작업에 매달려온 작가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40대에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판화로 석사 학위까지 땄으니 “판화에 진심인” 분이 맞습니다.

박래현에게 직접 묻지 못한 질문을 그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판화냐고요. “흔히 판화가 평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회화의 붓질로 표현할 수 없는 입체감과 깊이가 그 안에 있다”고 답하더군요. 아름다움엔 장르가 없습니다. 박래현도, 루이스 부르주아도 빠졌던 판화의 매력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중앙일보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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