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숙의 회화

 

정물화를 재고하다

 

 

 

   장르로 치자면 민경숙의 회화는 정물화에 속한다. 영어로는 still life다. 이 말 속엔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정적인 생명, 움직임이 없는 생명, 정지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정지된 생명? 죽음이다. 우리 말로 정물화에 해당하는 영어 still life는 이처럼 그 말 속에 죽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서양미술사에서 정물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크 미술에서였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렇다. 바니타스 그러므로 인생무상이라는 전언을, 메멘토모리 그러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를 정물화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정물화에 등장하는 생명, 주로 자연은 비록 아름답지만, 모든 생명, 그러므로 자연, 그리고 어쩌면 아름다움마저도 운명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이처럼 정물화가 상기시키는 죽음의 그림자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물화 자체, 그러므로 생명 자체, 자연 자체, 아름다움 자체에 끌린 사람들도 있었다. 자연을 곁에 두고, 보고 즐기고 향유 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장르 페인팅이 그렇다. 이젤 페인팅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시장이 형성된 것과 그 시기며 맥을 같이 한다. 그 자체 정물화의 또 다른 쓰임새로 볼 수 있겠다. 이로써 정물화의 감각적 표면을 보는 사람과, 정물화가 상기시키는 이면의 의미를 읽는 부류로 구별해 볼 수도 있겠다.▶그리고 여기에 정물화의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 정물화는 그 말 속에 정적인,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정물을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밑에서 보고, 뒤집어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움직임이 없으므로 사물 대상의 됨됨이를 파고들기에 그만이라는 말이다. 표면의 감각적 변화를 좇아 자연으로 나간 인상파 화가들에 반대해, 사물의 본질을 추구한 세잔이 그리고 남긴 일련의 정물화가 그렇다. 심지어 풍경을 그릴 때조차, 나아가 사람마저도 세잔의 그림에서는 정물(화)처럼 보인다. 그렇게 세잔이 보기에 정물화는 형식실험을 위한 연구대상이었다.▶이처럼 정물화는 그 이면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감각적 표면이 미적 쾌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사물 대상,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됨됨이를 파고들게 만든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겹치는 정물화의 세 층위로 봐도 되겠다.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민경숙이 그린 일련의 정물화 역시 이 세 층위가 중첩돼 있다. 때로 그의 정물화는 죽음을 상기시키고(역설적이지만, 플라스틱 조화만큼이나 생생한 생화가 그렇다), 더러 감각적 쾌감을 자아낸다(사과나 버찌가 먹고 싶고, 곁에 두고 보고 싶다). 그리고 사물 대상의,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감각적 현상에 대한 형식실험을 엿보게 한다. 주로 사물 대상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빠져들게 만든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일부 발췌

 

Tong-In Gallery, 32 Insadong-gil Jongno-gu Seoul
©2019 by 통인화랑. All Rights Reserved.